본문 바로가기

SERMON

상상이 담긴 설교 [책, 워렌 W. 위어스비]


설교를 듣는 사람은 ‘상상하는’ 존재이다. 

설교가 사람을 향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설교를 듣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상상하는 존재’이며 ‘상상에 굶주려 있는 존재’다. 그래서 위어스비는 설교가 단지 말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림’으로 그려져야 한다고 말한다. 상세하게 그림으로 그려줄 때 사람들이 그림을 마음으로 보고, 체험하여 변화를 받음으로써 설교가 비로소 삶에 적용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이미지를 만들고 이미지를 사용하는 존재다…우리가 사고하고 개념을 형성하는 과정이나 우리에게 와닿는 어떤 신호를 조직하고 이해하는 과정 모두가 우리 정신 안의 이미지를 통해 전개되고 형성된다. 우리가 쓰는 언어란 알다시피 모두가 상징 체계인 것이다.”

 설교는 가슴에 하는 것이며, 가슴은 상상으로 뜨거워진다. 

사람들은 가슴이 뜨거워지기를 원한다. “설교의 목적은 듣는 사람이 설교의 합리성을 인식하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를 통해서 어떤 비전을 보게 하는 데 있다”(Halford Luccock) 설교는 사람의 머리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전체를 염두에 두는 것이다. 논리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감동시키기 위해서 위어스비는 상상력으로 가득찬 설교, 상상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설교, 상상력으로 사람의 감정을 뒤흔드는 설교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가슴이 뜨거워지기를 원한다는 것은 상상에 목말라 있다는 얘기도 된다. “가슴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그 자신의 이성이 따로 있다.” 우리는 언어를 가지고 말하고 쓰지만 생각할 때는 언제나 영상이나 그림을 통해서 한다. “인간 정신은 토론장이 아니라 차라리 화랑”이라는 말처럼 “상상이 우리를 지배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여기서 상상은 “새로운 것을 창조할 뿐만 아니라 익숙하고 낯익은 것도 신선한 방식으로 새롭게 보고 느낄 수 있게 하며, 예로부터 내려오는 진리를 새롭게 표현하여 인생에 새롭게 적용할 수 있게 하는 적용”(Leland Ryken)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도록 ‘그림 언어’(메타포)를 사용하고 있다. 니고데모 이야기의 거듭남에 대한 말씀, 사마리아 여인에 말씀하신 ‘물’,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말씀 등은 우리의 상상력으로 성경을 읽도록 요구하고 있다. 상상력은 성경을 정확히 연구하고 그 메시지를 가슴으로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논리와 은유 중 어느 쪽이 더 강한가? 

사무엘하 17장에는 아히도벨과 후새가 압살롬에게 한 이야기가 나온다. 압살롬은 후새의 모략을 택한다. 후새와 아히도벨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후새는 은유, 곧 그림언어를 사용했다. 후새는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들은 그림을 떠올리려 생각하고 머리뿐 아니라 가슴으로 반응한다는 사실을 후새는 잘 알았다. 후새는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았기 때문에 압살롬의 마음을 화랑으로 생각하고 그림언어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그는 새끼 뺏긴 곰, 사자, 바다의 모래, 땅에 내리는 이슬, 무너진 성 등과 같은 ‘그림 언어’를 사용하여 말했다. 후새는 사람들이 상상에 대한 갈증을 갖고 있으며 그 갈증을 축여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히도벨의 ‘논리’를 후새의 ‘은유’가 더 강한 것이 증명된 셈이다. 오늘날 설교자들은 상상에 목말라하는 청중들이 건전한 상상을 하여 목마름을 채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은유’가 주는 힘은 다윗을 책망한 나단의 메시지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난다(삼하 12:1-4). 다윗은 목동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생하게 그림을 그리며 경청하고 있었다. 나단이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했을 때, 다윗이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참회하게 된 데에서도 은유적 표현이 주는 힘이 어떠한가 알 수 있다. “딱딱한 윤리를 가르치려면 시적이고 예술적인 말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듣는 사람에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순종은 늘 상상과 연결될 때만 일어난다”(Walter Brueggemann) ‘듣는 사람에게 변화를 일으킴’이야 말로 설교가 겨냥하는 모든 것인데, 설교자가 하는 말을 듣되 귀로 들은 것을 ‘눈으로 봄’으로 청중이 진리를 보고 마침내 자기 인생의 변화를 원하게 된다. 암양같은 밧세바를 범한 다윗이 회개한 것처럼. 

 은유의 힘과 신비 

“은유는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둘을 하나로 연결시켜 놓고 보면 그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의미가 새롭게 발견되니 말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실 때 소금과 제자는 하나로 연결되어 제자의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은유는 성경과 현대인의 삶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당시의 사건을 다루는 설교를 하면서 청중이 그 장소와 사건으로 가 있는 것으로 상상하게 하면, 오늘 우리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험난한 항해”와 같은 은유적 표현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한다. “좋은 은유란 듣는 사람에게 충격을 주어 기존의 생각을 뒤흔들고 긴장시키는 혁명적인 것”이기 때문에, 설교를 통해 은유를 듣는 청중은 “아, 보인다.” 혹은 “아, 그렇다.”며 머리와 가슴이 연결되어 진리를 마음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은유가 분명하게 정의된 교리를 다르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접근해서 성경 진리를 희석시키고, 마침내는 신앙 자체를 떠나게 만들 수 있다. 

 균형잡힌 설교 : “지성과 감성을 터치하는 설교” 

창세기 9장을 본문으로 어떤 목사는 아카데믹하게 설교했다. 반면 어떤 설교가는 “늘 무지개를 봅시다”라는 제목으로 개념과 이미지를 적절하게 배합해서 상상에 굶주려 있는 청중에게 설교했다. 청중의 귀는 눈이 되어 상상을 했고 말씀은 그들의 가슴에 부딪쳐 왔다. 청중이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는 것은 그들 자신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를 흥미진진하고 개개인의 가슴에 닿도록 선포하지 못한 설교자의 책임도 크다. ‘균형 잡힌 설교’는 지성과 감성을 하나로 보고 선포하는 설교를 말하는데, 먼저 상상과 은유적 이미지를 통해서 감동을 받게 된다. 감동없이 인지되는 것은 단순한 지적 작용이며 수명도 길지 못하다. 지성과 감정이 하나 되는 것은 상상에 의해 시작된다. “설교의 목적은 사람들이 그 설교가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알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를 통해 무언가를 보게 하는 데 있다.”(핼포드 루콕)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으니…”라며 그림을 그리듯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감동받아 자신들의 삶을 결단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상상을 사용하여 부흥을 이끌었다. 조나단 에드워드 이후로는 “지성과 감정 모두에 호소하는 설교 유형이 미국에서 점점 사라졌다.” 벨라는 미국 사회가 과학과 이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시와 종교 세계에서 오래도록 자양분을 공급받던 비전이 고갈되었다고 진단한다. 반대로 기술과 소비를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건전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도록 유혹한다. “사내답게 생긴 카우보이가 담배를 멋있게 물고 달리는 모습, 섹시한 여인이 미끈한 새 자동차에 기대는 장면 등.” 특히 포르노그라피를 통해서 사람들이 헛된 상상을 하고 있다. 그들은 무엇을 보고 있지만, 보이는 것은 허상이며 상상하는 마음을 피폐하게 만든다. 현대의 문명은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그 잔상을 남기는데, 상상은 말이나 개념을 통해 자라지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자라지는 않는다. 시각적인 것으로 상상의 선물을 병들게 하는 시대에 설교자는 상상으로 그 영혼을 새롭게 해 주어야 한다. “가장 위대한 일은 은유(메타포)의 거장이 되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상상이 담긴 설교가 갖는 힘과 효과 

상상력으로 많은 이미지를 담을 수 있는, 그래야만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설교는 장례식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장례식 설교에서 주의 할 점은 설교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뭔가 교훈적인 내용을 굳이 담으려고 해서도 안된다. 설교를 전할 때나 설교 구성에서 전형적인 설교투의 흐름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 설교는 하나의 진리를 아주 명료한 방법으로 전해야 한다. 그래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잘 이해할 수 있고 자신들에게 적절하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거룩한 상상력을 많이 할수록 메타포는 강하게 드러나 슬픔 속에 있는 사람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이다. 
  상상력과 함께 유머도 건전하게 사용하면 설교의 효과는 더 커진다. 유머를 잘 구사하는 사람은 “한 대상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다. 청중을 한 번 웃기기 위해서 유머를 억지로 끼워 넣어서는 되지 않지만 “유머는 설교자가 소유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장점 가운데 하나이다.” 설교자가 개그맨은 아니지만 참된 유머는 그의 메시지를 청중의 가슴에 도달하게 하고, 설교자가 유머를 설교에서 지혜롭게 사용할 때 그의 달란트는 빛이 난다. “스펄전은 강단에서 설교할 때 쾌활한 모습을 지녔고 유머를 가득 담고 있었다…그는 설교 시에 자신을 그 설교에 온전히 몰아 넣었다. 그는 설교를 듣는 사람의 관심을 최우선으로 쳤고, 청중들이 그의 설교 안에 있기를 원했다…교회가 거룩한 강단에서 웃음을 몰아내고 카바레나 나이트 클럽, 파티장에서나 웃음을 찾을 수 있게 만든다면, 그것은 매우 좋지 않은 상황이 되고 마는 것이다.”(Helmut Thielicke) 성령님의 능력으로 거룩해진 인격을 지닌 “설교자의 유머는 다른 사람들의 엄숙함과 같이 귀한 것이다.”(William Jewett Tuker) “유머는 바깥에서 거리를 두고 당신 자신을 바라 볼 수 있도록 하는 힘이고 일종의 균형 감각이다.”(C. S. 루이스) 

 복음적인 설교는 상상력을 동원할 때 더 강해진다. 

모든 설교는 복음적이어야 한다. 설교의 목적과 의도는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어야 한다. 설교는 십자가에서 주님이 사람들을 위해 행하신 일을 선포하는 일이다. 천국과 지옥의 이미지에 대해서 설교자는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이 지옥을 진지하게 고민하여 인정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미 성경에 지옥에 대한 이미지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설교자는 이 이미지를 더욱 생생하게 묘사하고, 반면 천국의 아름다움을 그려주어 청중들이 충격과 감격으로 지옥과 천국의 그림을 그리고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구원의 이미지’에 있어서도 설교자는 성경에 나타난 이미지를 활용하되, 상상력이 가득차게 접근하여 메시지 작업을 한다. 설교는 인간을 통한 진리 전달이므로 설교자는 사신인 동시에 증인이다. 이 설교자의 상상은 죄인과 구주를 한데 연결시키는 도구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청중을 상상의 세계로 초청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알아야 한다. 설교자는 이 세상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자료로 해서 양식을 창조해 내도록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다. 여기서 가장 귀한 것이란 바로 영원한 복음이며 설교자의 연장이란 한껏 가동한 사고와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설교자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상상에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영광과 아름다움을 한껏 전달할 수 있는 양식을 창조해 내고자 한다. 잘 가르치는 사람이란 듣는 자의 귀가 눈이 되게 해서 진리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그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신 대로 선포하는 것이 성서적 설교라면 위어스비는 ‘상상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어떻게 상상력을 강화시킬 수 있을까? 

예술적인 성막 건축의 감독자들이었던 브살렐과 오홀리압처럼 성령님께서 도와 주시면 우리도 상상력과 창조력을 가질 수 있다. 창조적인 사람은 균형잡힌 사람이다. 창조적인 사람은 건강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인데, 건강한 상상력은 ‘먹음’을 통해 살아나고 건강해진다. 독서는 우리의 상상력을 건강하게 살려 주기 때문에 독서를 할 때 묵상 노트나 카드를 활용하여 상상이 일어날 때마다 기록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독서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피조물, 인간 세계, 우리 내면의 감정 및 식견의 세계, 예술 과학의 세계, 변함없는 성경의 세계가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창조적인 사람은 어휘를 늘려간다. “언어의 한계는 곧 그 사람 세계의 한계다. 어휘력이 늘면 그만큼 그의 세계도 확장된다.” 단어란 우리로 보게 하는 등불이요 집을 짓는 도구요 운전할 때 붙잡을 손잡이요 싸우는 무기다. 

 나는 어떻게 설교를 준비할 것인가? 

먼저 본문에 대해 관찰하고 해석한다.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 본문은 ‘어떻게’ 말하는가? 비유인가, 알레고리인가, 격언인가, 서사문인가를 물어야 한다. 본문은 처음의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 본문이 오늘의 ‘교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본문이 ‘내’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본문이 ‘청중’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다음에 설교자는 “청중들에 어떻게 본문을 의미있게 만들 것인가?”를 놓고 고민한다. 
  나는 설교자로서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어디에? 사람의 마음에 전한다. 사람의 마음은 화랑과 같다. ‘그림언어’로 마음의 화랑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려 줄 때, 청중은 말을 들으면서 눈으로 그림을 그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 성령께서 그 ‘그림언어’를 가슴에다 전해 주시기 때문에 청중은 변화를 경험한다. 그러므로 말씀을 문법적-역사적이고 신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되, 사람의 변화는 ‘감동’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감동’을 일으키는 언어를 구사해야 하겠다. 언어는 역동적이므로 ‘독서’와 ‘상상’과 ‘묵상’과 ‘영상물 감상’을 통해서 ‘살아있는’ 말이 되도록 해야 하겠다. 나의 인격에서 나오는 유머가 새로운 자각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상상 다른 각도에서 보는 연습을 해야 하겠다. 물론 이 모든 언어는 성령님에 의해 길들여지는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 특히 성경 본문이 ‘메타포’를 제시할 때는 그 그림언어를 살아있는 언어가 되도록 해야 한다. 반면 본문의 문자적 의미를 벗어나 알레고리칼하게 적용하는 일이나 언어유희에 집착하는 것은 없어야 할 것이다.    워렌 W. 위어스비, 이장우 옮김 / 요단출판사

살짝 옮겨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