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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샘교회

Randy's funeral service.

지지 난주 11일 랜디 집사님의 문병을 갔다. 암수술 후 수술은 잘되었는데 회복이 더디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 그리고 오집사님 그리고 랜디 집사님의 부인, 김외자집사님과 병원에 갔다. 중환자실에 갔더니, 다행으로 일반병실로 옮겨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막상 일반 병실로 갔더니, 반갑게 우리를 보고 웃어주는 집사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집사님이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


수술후 회복이 좋지 않고, 또 합병증으로 인해서 그만 운명을 달리 하신 것이었다. 이미 랜디 집사님의 어머니는 죽은 아들의의 운명을 슬퍼하고 있었고, 곧이어서 오열하는 김외자 집사님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렇게 강인해 보이던 집사님이, 참으로 덧없이 가버린것이다. 교회에서 따뜻한 정을 느끼던 분중의 하나이며, 소리없이 많이 도와주시던 분이신데, 그냥, 소리없이 그냥 가버리셨다. 나의 슬픔도 슬픔이지만, 아들을 잃은 어머니, 그리고 남편을 잃은 외기러기된 부인의 마음을 위로해주기에는 너무나 힘이 없는 나의 모습을 한번 더 발견하게 되었다. 주님께서 그들의 좋은 위로자가 되시리라..


다음날 부터 위로하여 예배드리고, 일단 장례 준비를 시작하였다.

미국에서의 장례는 한국과는 여러모로 다른 것이 있다. 사실 몇번 장례식에 참석해 보긴 했지만, 미국식의 장례는 전혀 익숙치가 않은데, 솔직히 걱정이 되었다. 잘 할수있을까?


일단 유족들은  F.D funeral Directer 를 만나는 것으로 부터 시작이 된다. 이미 단골? Funeral Home (장의사, 장의집)이 있어 연락을 했고, 토요일에 이들이 도착해서 집에 guest book 과 의자 그리고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놓았다.


일단 내가 준비할 것은 장례 예배를 준비하는 것이다. 장의사가 이미 준비해논 장례의식 순서에다가 몇가지를 빼고 집어넣고 유가족들과 상의해서 예배 순서 준비를 끝내고 다시 장의사에게 보내서 순서지를 만들라고 했다.


그리고 유족들은 장의집에 가서 관 Casket 을 고르게 된다. 그리고 랜디집사님이 군인이었으니, 밀리터리 세리모니를 하게 되서, 장의사에게 말해, 군부대에도 연락하도록 이야기를 했다. 장례식 날에 군인들이 미국 성조기를 가지고 올것이다. 일주일만에 장례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 중간에 시간을 내어서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니, 미국인들은 생소한 가보다. 그러나 내심 반가워한다.


장례하는 하루 전은 장의집에서 viewing 을 한다. 이 것은 고인대면이라고 해야 하나, 관을 열어서 죽은 고인과 마지막으로 대면하고 싶은 사람은 하라고 한다.

목요일 6-8시까지 일정이 잡혔다.


시간이 되서 도착하니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는 않는다. 장의집에는 방이 몇군데가 있는데 방방 마다 죽은 시신과 관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해당되는 죽은 시신의 뷰잉 시간이 되면 FD 가 관을 본당으로 가지고 오게 되는 것이다.


병원에서 고인을 뵈었을 때에는 정말이지 죽은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마지막에 보니 몸이 많이 줄어있다는 느낌이 들며, 이제 생명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병으로 인해 몹시도 힘들었을 고인을 생각하니, 이제는 병 없는 곳에 있는 것이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남겨진 유족들과 교회 식구들에게는 커다란 아픔이다.


장례예배가 아직도 감이 잘 안잡힌다. 그래서 장의집에 갔을 때에 장의사를 만나자고 해서 여러가지를 물어 보았다. 매우 예의 바르지만 조용하게 미국 장례의 순서나, 방법등을 알려주고, 당일날 어떻게 할 것인지 브리핑을 들었다. 그리고 나는 Cook 목사님께 설교 본문 영어 교정을 부탁드렸다. 그리고 장례 순서에 대해서 다시 한번 논의, 이제 감이 좀 잡히는 것 같긴 한데, 여전히 잘할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장례예배는 교회 본당이 꽉차게 사람들이 왔다. 친척들이 매우 많고, 동료며, 평소에 고인의 인간관계를 알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장례식 전에 사람들은 이미 입장해 있고, fianal viewing 을 하게 된다. 목요일날 못왔던 사람들은 지금이 마지막으로 고인을 보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이윽고 시간이 되었다. 나는 Rev. Gamble 과 Pastor Cook 그리고 Elder Parker 들과 함께 유가족이 오기를 기다렸다.


장의사가 준비한 리무진을 타고 유가족들은 도착할 것이다. 드디어 유가족들이 왔다. 이제부터 내가 리더해야 하는 시간이다. 장례식은 Congregation stand! 라는 말로 Processional 이 시작된다. 유가족들이 오면 모든 사람이 자리에게 일어나 유가족을 맞고, 나는 순서를 준비한 사람들과 유가족을 리더하면서 식장안으로 들어갔다. 오히려 예배를 시작하니 마음이 편하다. 예배인도는 항상 하던 것이 아닌가? 여러가지 순서를 거쳐서 설교 시간이 되었다. 나사로와 마리아, 마르다를 통해서 보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에게는 새생명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설교하다


설교가 끝나고 모든 식이 끝나게 되면, fd가 이제부터는 진행을 하게 된다. flower girl 과 poll bearer 를 부르고, 관을 교회 문앞으로 가지고 간다. 사람들은 식장을 나가면서 다시 한번 아쉬움을 삭히는 시간을 갖게된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헤어질 시간이 되는 것이다. 가족들과 몇몇의 사람들은 장지로 가게 된다. 장지는 Goodwill presbyterian Church. 제일 처음 경찰차가 가면 그 뒤로 fd가 가고, 그리고 나는 세번째의 순서를 서게 된다. 그리고 내 뒤로 유가족의 차가 계속해서 따라온다. 장지에 도착하면 하게 되는것이 graveside service 즉 하관에배가 된다.

 

무덤 옆에서 드리는 하관예배는 너무나 간단하다. 성경 한 구절 읽고, 아주 짧은 메세지를 전하고 기도한다. 그리고 나면 미리 준비된 미군 병사들 (2명)이 와서 고인에 대한 예를 하고 성조기를 잘 접어서 유가족 대표에게 전해준다. 어찌나 분위기가 엄숙하던지.. 그리고 때에 따라 총을 쏘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 같은 경우는 여군 하나 남자 군인하나가 와서, 고인에 대한 예를 하였다.


이 것이 다 끝나면, 이제 축도를 하게 되고, 그 축도를 마침으로 모든 순서는 끝나게 되는 것이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죽음을 이제 받아들이는 연습만이 남은 것이다. 장례후 몇일 뒤 김외자 집사님을 찾아갔가. 위로하고 싶어서 였다. 집사님 말이 가끔 신랑이랑 침대맡에 앉아서 밤이 깊도록 이런 저런 말을 하면서 하루의 일과를 나누곤 했단다. 그날도 무의식 중에 일어나서 침대맡에 앉아 남편이 있겠거니 하고, 이런 저런 말을 했단다. 그런데 막상 남편이 곁에 없는 것을 깨닫는 순간....복받치는 울음에 서럽게도 울었다는 말을 들었다. 문뜩 고등학교때에 아버지를 잃어버린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세상의 어떤 말로도 위로가 안되는 그때의 참담한 마음이란..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소망이 있다. 우리는 분명히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장례의 모든 것이 끝나고 수고한 사람들과 같이 사진을 찍었다 두번째, 내 옆에 John Cates, 그리고 랜디 집사님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Jim Grubb 그리고 우리 교회의 남성 소그룹 Boaz의 리더인 Gary C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