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곤 목사님 (함열교회)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 받은 자들에게는 사역의 분기점(폭발점)이 있다. 이것은 인생에 BC(그리스도 이전)와 AD(그리스도 이후)의 분기점처럼 성령세례를 받아 성령의 능력에 붙잡힘을 받은 것을 말한다. 다혈질인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세례 이후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고”(벧후 1:4-7), 1907년 1월 사경회에서 길선주 장로가 “나는 아간과 같은 사람입니다”라고 통회자복할 때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분기점이 되어 평양부흥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1920년대 부흥운동의 기수 김익두 목사가 비몽사몽간에 큰 불덩이를 받은 것이 사역의 분기점이 되었고 (『한국교회 부흥운동 연구』 참조 - 박명수 박사), 이성봉 목사가 1937년 안수를 통하여 ‘불의 폭발’을 체험한 이후 더욱 힘있게 순회 부흥강사가 된 것 등이다(『말로 못하면 죽음으로』 참조 - 자서전).
이처럼 교단의 사부인 이명직 목사와 성결신학의 시조인 웨슬리에게도 분명한 성령세례를 통한 사역의 분기점이 있었다. 이명직 목사는 1924년 10월 활천지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2003년 3월 활천 - 손동식 목사 재정리). “내가 과거에 은혜를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로 시작하여 경성성서학원 교사 시절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성결을 은혜로만 알았지 체험하지는 못하였고, 성결의 설교는 할지언정 성결을 실행치는 못하였고, 성결을 변론은 할지언정, 성결을 간증치는 못하였다. 나는 의문과 미혹의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성결치 못한 나는 형식으로 꾸며가고, 심령이 부패한 나는 표면만 단장하기를 힘썼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진솔한 고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목사님은 이에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1921년(32세) 가을학기 때 결심하고 골방에 들어가 씨름하며 기도한다. “주여! 나에게 성결을 주시든지, 사명을 거두어 가시든지 하소서.” 그의 간절한 기도는 3일째 저녁에 주님을 만나고 “나에게 주의 음성이 임하고 그의 거룩하심을 보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아! 그때 그 순간의 성신의 역사는 다 말할 수 없다. 나는 그때에 성신이 충만하게 되었다. 새 능력에 포위되었다. 이것은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 처음 체험하는 영적 경험이다. 한참 동안 울고, 웃고, 혼자서 춤추고, 술 취한 사람과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였다. 내 속에서는 뜨거운 불길이 치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날 이 목사님이 신학생들에게 간증하게 될 때 “성신이 임하며 홀연히 질그릇 깨지는 소리, 신음하는 소리, 통곡하는 소리로 전 학원이 진동하게 되었다. 수업은 전면 중단되었고, 학생들이 금식하며 기도할 때에 성신께서 친히 임하셔서, 모든 사람의 행위를 찌르게 되어 도적질한 것, 간음한 것까지 공개적으로 자복하게 되었고, 어떤 날은 회개의 편지가 학원에서 200통이나 발송되었으며, 나의 평생에 처음 경험하는 진정한 부흥이었다”고 기록했다. 이상은 교단의 사부이신 이명직 목사의 성령세례와 성결체험 사건이다.
이후 경성에는 놀라운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주일날이면 오전에 개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 초교파적으로 경성신학교에 모여 성령충만성회(성별회)를 갖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성결복음이 확산되고 교단이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웨슬리는 올더스게잇 중생의 경험 이후 다시 불안과 불신앙과 패배의식이 그를 엄습하였다. 그리고 고백하기를 “생활에서 특별한 변화도 없었고, 설교에 여전히 감화력이 없었다고 고백한다”(『존 웨슬리 생애』 48쪽 - 송홍국). 그는 외적으로뿐 아니라 내적으로도 자유함을 얻으며 성령과 일체가 되는 생활을 원했다.
웨슬리는 이런 심적 고통 속에서 주님의 약속하신 성령세례와 능력을 받기 위해(행 1:4-5, 눅 24:49) 몸부림친다. 그는 1738년 여름에 3개월 동안 친구와 함께, 독일의 모라비안 본부를 방문하여 신앙의 지도와 격려를 받는다. 그리고 10월 9일에 미국의 영적 거성인 조나단 에드워드가 쓴 『노스햄프턴 대부흥운동사』를 읽으며 더 큰 능력, 새로운 은혜를 사모하게 된다. 그리고 1739년 12월 31일 런던 시내의 페터레인(Fetter Lane)에서 송구영신 예배를 갖는데 여기에는 후에 대 부흥강사가 된 휫필드와, 매형, 동생 찰스를 포함한 7명 목사와 60여 명 성도들이 성령대망회를 가졌는데, 이때 성령세례를 받는다. 웨슬리는 1739년 1월 1일 일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밤을 새워 갈급하게 기도하고 있을 때, 새벽 3시경,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 위에 강하게 임재하였다. 그 권능 아래 많은 사람들은 넘쳐 흐르는 기쁨으로 울부짖었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의 현존 앞에서 깨어나자마자, 한 목소리로 ‘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십니다’ 하고 찬양을 불렀다.”
이날 이후 웨슬리는 노방전도를 시작하였고, 공동묘지에서 대중집회를 인도하였으며, 귀신을 몰아내고 병을 고치며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외치는 등, 그의 강력한 부흥사역에 분기점이 되었다.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서 페터레인 이후 많은 은사사역과 기름부음과 강력한 임재가 있었음을 기록했다(1939년 4월 26일, 5월 20일, 6월 15일, 10월 23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후부터 깊은 절망이나 의심에 빠지지 않고 성령안에서 자유함을 누렸다고 노년에 고백하고 있는 점이다(『웨슬레 신학』, 100-109쪽 - 이성주). 그리고 웨슬리 생애에 수많은 역사들(charismata)이 나타났는데, 분명한 것은 페터레인 성령세례 이후라는 것이다.
리버티 신학대학 학장인 엘마타운즈는 『세계 10대 부흥의 역사』(The Ten Greatest Revivals Ever)라는 책에서 페터레인 사건을 웨슬리 부흥운동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또한 그 당시 런던 시내에는 6가구당 1가구 꼴로 선술집(grogshop)이 있었고, 단돈 1페니면 밤새 취하는 때였는데, 웨슬리의 성결복음이 그 사회를 정화시켜 술집들이 문을 닫는 역사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정영관 박사는 그의 논문 “웨슬리의 영적 체험”에서 올더스게잇과 페터레인 두 가지 경험이 모두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두 경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온전한 복음을 말하는 웨슬리를 생각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나채운 박사, 송홍국 박사는 웨슬리가 올더스게잇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어 종의 믿음에서 아들의 믿음을, 율법 아래에서 은혜 아래 있게 되었으며, 페터레인을 통해 성령의 능력을 힘입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최홍식 목사도 페터레인체험 이후 능력설교, 능력전도, 능력선교가 이뤄졌고 ‘메소디스트’란 새로운 선교단체가 만들어졌다라고 말한다.
교단 100주년 100만 성결인으로 확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명직 목사나 웨슬리의 성령세례와 성결 은혜를 사모하고(요 2:23), 교단의 정체성을 회복하자. 또한 조나단 에드워드의 고백대로 시대적인 부흥, 참된 부흥(각성)운동은 사람들의 인위적인 작품이 아니라 주권적인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철저한 회개와 간절히 은혜를 구하면, 교단의100주년이면서 평양 부흥운동의 100주년이 주는 2007년에는 놀라운 성과가 이뤄질 것이다.
(활천 2004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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