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8장 1-8.
- 설교의 변 :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읽을 때 과부의 열심있는 행위에 촛점을 맞추나, 사실은 그것이 주제가 아니라 불의한 재판장 같지 아니한 우리의 하나님이 촛점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 사람들은 이 구절을 열심히 간구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구절로 듣는다
- 그래서 우리들은 과부처럼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고 한다.
- 3절을 보자, 과부가 얼마나 열심히 가서 사정 사정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자주”라는 표현을 쓴다. 이로 보아 무지하게 정성을 다해 열심을 다해 “땡깡”을 피웠거나 사정 사정 했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관은 참 하나님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사람도 안 무서워하는 흔히 말하는 안하무인이기에 4절에서 처럼 듣지도 않고 신경도 안쓴다
- 그러나 이 과부가 너무나 간절히 간구하고, 자주 와서 소원을 풀어달라고 하니,
이 재판관이 그것이 이제는 귀찮아서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어야겠다 라고 생각한다.
- 그래서 5절을 보면, 아마도 이 이야기가 해피앤딩으로 끝났을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불의한 재판관이 정말로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과부는 응답을 받았더라,,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더라~~)
-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이 말씀으로 격려하고, 권고한다. “열심히 부르짖자는 것이다” “열심히 기도하자는 것이다” 이 것을 보고 어떤 분들은 “강청기도다” 즉 강하게 부르짖는 기도라고 생각한다.
- 그리고 이런 강청기도는 하나님께 강하게 떼를 쓰는 것 처럼 기도하고 끝장 볼 때 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것으로 우리는 안다.
- 마치 아이가 끝까지 조르면 엄마는 할 수 없이 불량식품도 사주고, 비싼 장난감도 사주고, 뭐 아이가 스포일되어서 해주는 것처럼 하나님도 해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 우리 한국 교회의 기도의 스타일이 바로 이런 스타일이었다. 이른바 “안되면 되게 하라”는 정신으로 부르짖기 시작했다. 새벽기도에 철야기도에 산산마다 기도원이 생기고, 도시에는 구국의 제단이라고 해서 기도의 제단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대언기도와 예언기도를 받고,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께 알려드리는 기도를 많이 했다.
- 그리고 간증하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1000번제 단을 쌓았다. 기도를 하루에 몇 시간씩 했다. 하나님이 응답하셨다. 교회 안에 자매들은 자기가 결혼할 사람의 키부터 시작해서 직업까지 상세하게 하나님께 아뢰었고, 게중에 어떤 자매들은 기도한 것은 다 응답하셨다고 간증한다. “단지 머리에 대해서는 기도를 안해서 그런지 남편이 대머리가 될 것같아요..” 뭐 이런 우스개 소리도 있긴 했다.
- 큰 교회 목사님들도 이런 말을 자주 하였다. “분명한 목표와 불타는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뜨거운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뜨거운 감정이 담긴 기도를 드리십시요, 감정이 깊어지면 갈망이 되고 충분히 갈망하면 놀라운 기도의 응답이 나옵니다.
- 그리고 그것에 대해 목숨을 걸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런 기도는 사실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의 뜻을 알리기 위한 기도가 되기 시작했다.
- 그럼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이렇게 이 여인처럼 자주 가고 계속 강청하면서 기도하면 그 기도가 응답이 될까? 우리가 강청의 기도를 해본적도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다 들어진 경험은 없는 것 같다.
- 자 강청이란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서 돈을 달라고 강청의 기도를 해보면 어떻게 해야 할까?한번 해보자.
- 먼저 하나님께 하나님 돈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또 돈이 왜 필요한지를 말할 것이다. (빌을 내야 되고, 먹을 것을 사야 하고, 인간답게 살아야 하고, 자식들 책이라도 보고 학원이라도 다니게 해야 하고, 병원도 가야 하고) 그리고 돈이 왜 필요한지 말한 다음에는 이제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께 또 돈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 그리고 또 나서는 무엇에 쓸 것인지 기도하지 않을까? 결국 누군가 그 기도를 듣는다면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이 저 사람에게 빚을 졌나봐!!)
- 여러분 이렇게 했던 기도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뜻도 생각지 않고 말로 계속해서 주님께 하는 기도를 뭐라고 하는가? 돈주세요, 돈주세요, 돈주세요….(어메이징 그레이스에 맞추어서)이런 기도는 사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바 “중언부언하는 기도”에 가깝다.
- 주님은 우리에게 중언 부언의 기도, 계속해서 그냥 반복하는 기도, 기도의 횟수, 기도의 시간의 길이, 기도의 분량..이런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지 않으신 것 같다. 어쩌면 자명종처럼 계속 그렇게 듣는 사람을 괴롭게 까지 하면서 하는 기도를 알려주시지 않았다. .
- 그래서 오늘 본문을 우리가 과부를 본받아서 그냥 가서 계속해서 철야 농성하는 것처럼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의 가르침이 아니다.
- 오늘 본문의 주제는 계속해서 재판관에게 가서 사정사정하는 그런 과부의 적극성도 아니고 떼쓰며 기도해야 한다는 기도의 방법도 아니고, 마음에 간절한 바램을 이루기 위한 열정적인 기도도 아니다.
- 오늘 본문의 주제는 7절의 하나님이다.
- 예수님은 과부의 말을 하면서, 불의한 재판관은 그런 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살짝 보여 준다. 이 사회는 우는 놈에게 떡 하나 더주고, 메달리는 자를 도와주고, 우는 소리 하는 사람, 목메는 소리 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진다. 그러니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불의한 재판관이 있는 이 사회는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소리를 높인다.
- 그리고 우리는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불의한 재판관 앞에 여인처럼 상대방을 괴롭게 까지 하며 이야기 하려고 한다. 전도도 그럴 때가 있다. 그래서 부작용이 난다. 내가 열심히 하면 될 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해야 된다. 자기 열심의 모든 행위가 사실은 헛것이다.
- 그러나 하나님도 불의한 재판관 같으신가? 그런가? 하나님은 아니다. 밤낮 부르짖는 백성의 원한을 풀어주시는 분이시다.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는 분이 아니니,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할 필요도 없다.
- .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 같지 않으시기에, 우리가 계속해서 괴롭게 까지 하면서 기도할 필요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강청의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 이미 예수님은 하나님이 속히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 마태복음에서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다 공급해주시고 내일 아궁이에 던 지우는 들풀도 먹이시는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사실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다 아신다. 예수님은 아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
- 그럼 하나님께 강청 기도를 할 필요가 없다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냥 하나님 앞에 나가서 “아시지요”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8절을 보자, 우리에게 속히 원한을 풀어주실 우리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 불의한 재판관과는 전혀 틀린 하나님의 성품이(인자하신 아버지) 바로 우리의 기도 응답의 근거가 되는 것이고, 우리의 기도는 그 하나님의 성품을 믿고 하는 기도이다. 기도는 내가 열심히 해서 응답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간구할 때 응답 받는 것이다.
- 기도의 응답은 열심의 기도가 아니라 믿음의 기도이다. 열심의 기도는 믿음의 기를 낳지 못한다. 그러나 믿음의 기도는 열심의 기도를 부르는데, 그 믿음의 기도가 우리 기도의 응답의 바탕이다.
- 우리는 부르짖고 오래 기도하고 강청하는 기도를 보면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런데 오해 말아야 한다. 부르짖고 오래 기도하고 울면 기도하고 강청 기도한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다
- 기도하면서 여전히 삶이 변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여전히 자아가 변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오랜 시간 기도하는 것 같은데, 열심히 기도하는 것 같은데 옛날이나 지금이 별로 변화가 없는 사람이 있다.
-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면, 오래 기도하면 응답이 빨리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도를 막한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니 기도하면서 불안해 하고 의심하고 무슨 응답이 있는가 하고 조바심내고, 심지어는 금식기도까지 하면서 신경이 예민해 진다.
- 믿음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기에 그렇다. 믿음으로 하는 기도는 걱정과 근심이 없고 소망과 기쁨 속에 하루를 살아가게 한다. 오늘 여러분의 기도는 그냥 열심히 하는 기도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하는 기도인가? “믿습니다”를 강하게 믿쑵니다 한다고 그것이 믿음의 기도가 아니다
- 기도 후에 평안함과 기쁨 소망이 넘칠 때, 환경과 상관없이 찬양하며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을 때에 그것이 믿음으로 하는 기도인 것이다.
- 기억하시라 자기 의로 강청의 기도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바른 기도이다.
- 믿음이 좋은 기도는 무엇인가? 할수만 있다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이것이 바로 믿음의 기도이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이며 우리가 해야 하는 기도이다.
- 우리 손들고 기도하고 소리지르면서 기도할 수 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왜 나는 이렇게 사는 것입니까? 그렇게 울며 기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기도가 바로 오늘 본문에서 응답 받는 기도가 아니다. 하나님이 불의한 재판관 같다면 우리는 가서 떼를 쓰고 데모를 해야 한다. 철야, 새벽도 모자라서 문자 보내고 인터넷에 올리고 싸워야 한다. “각성하라, 각성하라!”
- 불의한 재판관 같지 않은 인자와 사랑이 많은 하나님 아버지께 믿음으로 나가는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믿음으로 하다 보니, 확신이 생기고, 그 확신에 소리가 높아지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뜨거운 마음이 되어서 기도하고, 부르짖는 기도를 하고,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 즉 외적인 강청기도가 응답의 기도가 아니라/ 믿음으로 메달리다 보니 그것이 때로는 강청 하는 것 처럼 보여진다는 것이다. 기억하시라 우리의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라 의로운 우리의 아버지이다. 그 아버지에게 기도 할땐 단 한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믿음이다.
- 8절 보자. 인자가 세상에서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이 말씀은 믿음을 보기가 쉽다는 것인가 어렵다는 것인가? 어렵다는 것이다.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하는데, 믿음의 기도가 없다는 것이다.
- 1절에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하는 것은 떼쓰는 기도가 아니라 바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기도가 되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이방인이 재판관 앞에서 나아가서 괴롭게 까지 간청하며 안해 줄까봐 조르고 달래고 협박하는 그런 기도가 아니라
- 하나님을 믿기에 간절함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하나님을 믿기게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을 믿기에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그런 믿음을 원하시는 것이다. “믿음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 열심의 간구가 아니다. 너희에게 믿음이 있다면 이산을 들어 저 산으로 옮기 운다 “열 심이 아니다, 강청이 아니다”
- 오늘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할 텐데 우리는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가? 모든 기도의 제목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음으로 하는 기도, 그래서 정말 인자하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기도, 응답받는 기도를 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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